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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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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4/08/12
막스 뮐러
출판 문예출판사
분류 소설 〉 독일 소설, 서양 고전문학

줄거리

『독일인의 사랑』은 『겨울 나그네』의 작가로 알려진 낭만주의 작가 빌헬름 뮐러의 아들인 막스 뮐러가 1856년에 발표한 그의 유일한 소설이자, 사랑에 관한 불후의 명작으로 불려지는 작품이다. 소설은 주인공 ‘나’와 심장병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소녀 마리아가 신분과 육체의 문제를 극복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마리아의 죽음으로 결국 이별을 하게 된다는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주인공 ‘나’와 마리아가 대화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이 책을 읽은 뒤에 이 책이 ‘로맨스’라는 생각이 든다면
단언컨대 이 책을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 한 것이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로맨스 소설인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평민 남성이고 상대는 ‘마리아’라는 귀족 여성이며,
두 사람은 사랑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로맨스 소설인 것은 아니다

애초에 두 사람은 로맨스적 의미의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도 로맨스인가?
친구 사이의 사랑도 로맨스인가?
세상에는 로맨스인 사랑과 로맨스가 아닌 사랑이 있고, 이 책은 철저히 ‘로맨스가 아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를 로맨스로 규정하거나 이 소설을 로맨스 소설로 언급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실례이며
주인공과 마리아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단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당연히 에로스가 아니며, 그렇다고 플라토닉조차 아니고 아가페에 가깝다


아무튼 이 소설을 읽은 뒤에 주인공과 마리아가 어떤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는 파악했지만
아쉬운 점은 ‘왜 주인공과 마리아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은 해결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 둘이 말하고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건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는가?
왜 이 둘은 사랑이 먼저고 깊은 이해가 나중에 따라올까?

사랑은 ‘왜’라고 묻지 않는 것, 타산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극히 가까우면서도 먼 진리이다. 왜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마리아에게 주인공 청년은 이렇게 외친다.

“왜라니요?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느냐고,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작품 해설 - 『독일인의 사랑』과의 재회

첫 눈에 반한 것도 아닌데, 서로에 대한 잘 모르는 상태로 아가페를 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나는….

이 훌륭한 소설에 3.5점밖에 주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위에 적어둔 것과 같이 주인공과 마리아의 사랑에 대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뭐 어떻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는 종교와 담 쌓은 본투비 무교 인간이고 신은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고전 유럽 소설의 너무나도 당연한 이 종교적 색채를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다
서양인들도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불교적 색채 가득한 동양 소설 읽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 아닌가? 같은 원리임
난 살면서 성경을 읽어본 적도 없는 걸

꽤나 인상적인 구절이 많이 나오는 소설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아가페라는 감정을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인생의 새벽빛이 영혼 안에 감추어진 꽃받침을 열어줄 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온통 사랑의 향기가 풍기게 마련이다.

둘째 회상

어떤 감수성을 가져야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거지

우리는 서서 걷는 것, 말하고 읽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사랑만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랑은 생명과 더불어 이미 우리에게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회상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사람마다 각자 정의가 다르고 전세계 인구의 수만큼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아는 이는, 사랑에는 척도가 없는 것,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비교가 있을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과 온 정성을 다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둘째 회상

사랑의 대소는 정말 판별할 수 없을까?
‘크기를 따지는 것은 무용하다’는 생각을 가질 순 있어도, 실제로 대소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벌써 오래전부터 생전에는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내게 현실 안에는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수도 없는 그런 형체로 부상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의 수호 천사―나의 또 다른 자아로 화해 있었던 것이다.

넷째 회상

어린 시절, 주인공과 마리아 사이의 그다지 많지 않다
설령 주인공이 마리아로부터 반지를 받고 그 반지를 돌려준 것이 주인공에게 매우 소중하고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해도
마리아는 주인공의 안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새로운 자아를 갖게 되었고 그것은 실제 마리아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서 자아를 가진 과거의 마리아’와 ‘오랜만에 마주한 실제의 마리아’ 사이에는 괴리가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괴리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일까?
어째서 주인공은 ‘나의 또 다른 자아’인 관념 속 마리아와 실제 마리아 사이의 괴리를 겪지 않는 것인가?

“…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신하여 살아주거나 죽어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믿어줄 수는 없는 게 아니겠어요?”

다섯째 회상

왜냐하면 사랑에 있어서는 그것이 가짜라는 징표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생각했답니다. 즉, 스스로 사랑을 아는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사랑을 알 수 없다구요. 또 그가 자신의 사랑을 믿는 한도 내에서만 타인의 사랑도 믿게 되는 것이라구요.

다섯째 회상

“… 오늘날의 시인이라면 나우시카를 여자 베르테르로 만들어버렸겠지요.―그럴 것이, 우리에겐 사랑이 결혼이라는 희극이나 비극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럼 다른 유의 사랑은 진정 없는 걸까요? 이 같은 순수한 행복의 샘은 아주 말라버린 걸까요? 사람들은 오로지 취하게만 하는 묘약만 알 뿐, 생기를 주는 사랑의 샘물을 모르는 걸까요?”

일곱째 회상

“이처럼 내 마음이 깨끗해진 순간에 있는 그대로 내 온 마음의 사랑을 고백하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초지상적인 것을 이처럼 가까이 절감하고 있는 지금, 우리를 다시는 갈라놓지 않도록 영혼의 약속을 맺읍시다. 사랑이 어떤 것이든 간에, 마리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느끼고 있습니다. 마리아 당신은 나의 것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회상

떠나가는 친구처럼 아쉬운 눈빛으로 우리의 영혼의 결합을 축복하듯 바라보고 나서 사라지는 희망처럼 침몰해간 그 태양이란 말이냐.

마지막 회상

그러니까 영혼의 결합이 뭔지는 알겠는데 왜 했는지를 모르겠다고
서로에 대한 이해 없이 아가페가 성립될 수 있느냐고

오빠와 누이처럼이든, 아버지와 자식처럼이든, 아니면 약혼한 남녀 사이이든, 어쨌든 우리는 영원히 공존하는 관계였다. 문제는 우리가 더듬대는 말로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것의 올바른 이름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너의 오빠라도 좋고
너의 아버지라도 좋다. 아니, 너를 위해 세상의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바로 이 ‘무엇’에 대한 이름을 찾아내야만 했다. 세상은 이름없는 것을 결국 인정하지 않으니까.

마지막 회상

왜? 대체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걸까요?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고 게걸스럽게 탐하지 않고는 여자를 쳐다볼 수도 없는 걸까요?

마지막 회상

이렇게나 열심히 ‘우리의 사랑은 로맨스가 아니다’라고 피력하고 있는데 정녕 이걸 로맨스로 보겠다는 말인가
마지막까지 열심히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사랑은 결혼을 염두에 둔 사랑, 즉 ‘로맨스’가 아니라고

남성과 여성이 사랑을 하면 로맨스인가? 그렇다면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고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도 로맨스인가? 남성인 친구가 여성인 친구를 친구로서 사랑하면 로맨스인가?
이 둘의 사랑은 부성애/모성애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고 그보다 더 깊은 사랑이라는 감정이지만 그렇다고 로맨스는 아니라고
말하자면 이 둘은 ‘공명(共鳴)’을 한 것이라고….


결론적으로 소설 자체는 꽤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세상에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라면 당연히 로맨스라고 생각하는 깊은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나 명확한 문장을 읽고서도 이 소설이 로맨스라고 곡해하게 된다

로맨스 아니라고… 제발
이 글에 로맨스는 단 1g도 첨가되어 있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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